점심이 지나도록 내내 비가 오고 있었다.   집에 혼자 있자니 막상 하고 싶은게 많다가도 할게 없었다. 딱히 하고싶은게 없다고 어느순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상은 항상 피곤함에 물들어있었고, 새학교로 전학하면서부터 피로감은 더했다. 새친구를 사귀어야하고, 이미 만들어진 규율과 체계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는다는것은 여간 쉬운일이 아니다. 


그날도, 이렇게 비가 왔었지,하며 생각에 잠긴다. 여전히 예전의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로 계속 생각을 억지로 덮어 씌워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나로써도 그 일에 대해 기억해내는 것을 언제나 꺼려했다. 그 일에 관한 기억의 열쇠는 마치 바닷가에 내버려 두고 온듯, 모래사장에 조용히 묻혀있을 터였다.


" 슈퍼에 옆집 아줌마 왔던데 진짜 인상이 무서웠어. "  


심부름을 갔다온 내 동생이 열변을 토로했다. 


" 그래도 그 슈퍼에서 파는거 품질은 좋아. " 


그렇다. 아무리 편견을 버리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어쩔수가 없는것이다. 편견같은것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보이는 것을 판단하는것의 문제니까.   그때도 처음 그 애를 만났을때는 그랬다. 어딘가 촌스런 옷을 입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학원선생님의 딸이 아니었다면 나는 친하게 지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 애와 이야기를 나누고,수업을 함께 듣고, 내가 한참 많은 일들을 겪고 난 후에야 그 애가 받았던 많은 상처들, 동생들을 지키기위한 그 애의 노력, 그리고 선생님이자 아버지로 그 애에게 가해진 폭력과 기정사실을 비로소야  알수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잘 먹고 살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텔레비젼에 나올만큼의 일을 겪는다고 생각하고있었다. 현실과 마주하고, 주변과 마주한순간의 충격은 지금도 가시질 않는다.


 문뜩, 가끔씩 그애가 떠오른다.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오늘은 선생님이 집에 돌아와 난장판을 치지는 않았을까하면서도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닌것같아 기억속에서 잊으려고 저만치 바닥의 깊숙한 심연에 묻어둔다.


  내 주변에 그런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본 적도 ,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나였다.  그렇게 그냥 전학을 와버린 나로써는 해결해줄수도 없는 문제이거니와,머릿속에서 빨리 지워야하는 일이었다.


" 아까 엄마가 약 먹으라고 했디, 니 약먹었나? "


" 먹었다!!"  


내가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수많은 일이 일어났던 고등학교 1학년을 지나, 스스로도 성숙해짐을 느꼈다. 달라진 고등학교와 주변환경, 어쩌면 내가 너무 풍족하게 살았다고 느끼게 되는 환경속에서.  


일반계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자사고로 전학한 나는 초반 굉장한 부담감에 빠져있었다. 자사고라는 타이틀, 그 부담이 나를 다시한번 내리 누르고 있었다. 내가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최고조에 달아 있었다. 그때쯤 사촌오빠가 중학교를 중퇴하면서 검정고시를 치고 수능을 볼꺼라는 말을 전해들었다. 잘해야한다는 마음에, 나는 당연히 성공할 수 있을거라고 자신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드는 불안감.  한 겨울에 피어오르는 입기처럼, 프림이 퍼지듯 피어올랐다.  당연히 할 수 있을거라 자신하던 나는 어느샌가 중학교 속에서 멈춰있었다. 고등학교에 와서 가장 달라진 점은 내가 밑에서 어느 정도인지, 그 정도를 알게되었다는것. 내 자신에 대해서 한없이 겸손해지는방법을 알게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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